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지원군 (문단 편집) === 총평 === 중국 공군 공식 역사서에서도 "창립 초기의 중국 공군은 열세였으나, 전투 중에 급속히 성장했다"며 6.25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소중한 실전경험을 쌓았다고 총평하고 있다. 어쨌든 창설 1년도 안되어 대규모로 작전을 경험한 것은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명백하다. 3년 간의 전투 끝에 여러 명의 에이스가 나왔고 미군 측은 그 중 7명을 공인하고 있다. 그중 최고는 [[자오바오퉁]](趙寶桐).[* 1928~1983. 1945년에 입대했고, 1949년에 창설멤버로 인민해방군 공군에 참가. 파일럿 교육을 받았다. 조종 교육을 받은지 1년 만에 6.25전쟁에 참전해서 미군기 9대를 격추했으니 대단한 재능인 셈. 베이징 군구 공군부참모장으로 퇴역했다. 전쟁영웅인데다가 매우 미남이었기 때문에, 여자관계가 문란, 조강지처를 버리고 여인과 동거하기도 하는 난봉꾼 기질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여자관계 때문에 [[문화대혁명|문혁]] 기간에 엄청나게 비판받았고, 군 내의 평판도 안좋았는지 한국전 최고 에이스치고는 출세하지 못했다. 중국 공군 2위의 에이스(7대)인 왕하이(王海)는 공군 최고계급인 상장까지 올라 공군사령관을 역임한 반면, 이 양반은 기껏 군구공군의 부참모장에 그친데다가 군 계급 부활 이전 퇴직 후 사망해서 장성 계급을 못 달았다. 하지만, 전기인 "공중전의 왕(空战之王)" 때문에 중국에서는 [[사카이 사부로]]와 같은 유명인사다.] 미군기 9대를 격추했다. [[파일:attachment/zhaob.jpg]] 자오바오퉁과 그의 MiG-15기. 9대의 킬마크가 선명하다. 한국전쟁 후 서방 측 평가로는 공산측과 유엔측의 전투기 교환비는 1:10 정도로 알려졌으나, 구 소련 측 자료가 공개된 최근에는 1:5.8 정도라고 정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련 공군 정예 항공사단(제303, 제324 항공사단)의 전과를 포함한 통계로, 이들을 제외한 소련 방공군, 중국 공군, 북한 공군 [[MiG-15]]을 상대로 한 미 공군 F-86A/E/F의 교환비는 1:9.07에 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